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타리 쇼크 (문단 편집) === [[서드파티]]의 탄생 === 아타리에 서드파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이 모든 것을 독점했다. 그러나 개발자들에게는 성과급은 커녕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에 아타리의 <[[어드벤처|Adventure]]>(1979)를 만든 워렌 로비넷은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면 자기 이름이 나오는 [[이스터 에그]]를 만들었다고 한다. 미로 속 어딘가에 열쇠가 숨어있는데, 작은 회색 점 모양의 열쇠를 찾으면 자신의 이름을 몰래 숨겨둔 비밀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비디오 게임에서의 첫 번째 [[이스터 에그]]'''로 알려져 있다. 이 에피소드는 어니스트 클라인의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2011)에도 소개되어 있다.] 물론 아타리가 크게 성장하기 시작한 해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발매한 1980년이지만, 개발자들은 여러모로 참을 수 없었는지 1979년 5월에 아타리의 프로그래머 몇 명은 레이몬드 카사르에게 자신들을 레코드 레이블처럼 판매량에 따른 성과급과 게임 크레딧에 이름을 올릴 수 있기를 요구했다. 카사르는 그 요구에 대해 그들에게 '수건 디자이너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나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다'라며 그들을 모욕했다.[* 이에 대해 레이몬드 카사르는 훗날 비 게임 개발자 출신과 서부 사람들의 뉴욕 사람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확대생산된 유언비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주간 경제 잡지 [[포춘]]에 오프 더 레코드로 '신경질쟁이 프리마돈나'라는 말한 것이 실렸는데 이에 대해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결국 그들은 회사를 떠나 1979년 10월에 '''[[액티비전]]을 창업했다.''' 이 [[액티비전]]에서 만든 게임들은 판매량과 평가 면에서 모두 상위권에 들어가는 명작 아타리 게임들을 개발했다. 하드웨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은 물론이고, [[슈퍼 마리오]]의 선조격으로 불리는 [[피트폴]]이 바로 액티비전 작품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 서드파티였다. 아타리는 자신들 밖의 누군가가 자신들 게임기의 게임을 만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게임 회사들은 기기를 분해하고 [[리버스 엔지니어링]]으로 아타리 게임기를 연구하여 무허가로 게임을 개발했다. 아타리에서는 그들에게 특허 침해 혐의로 소송을 걸었다. 결국 1982년에 아타리가 특허료를 받는 조건으로 게임 회사들과 화해하면서, 다른 게임 회사에서도 아타리에게 특허료를 지불하면서 아타리 게임기에 게임을 출시하는게 가능해졌다. 서드파티라는 개념은 이 때 탄생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아타리에서는 다른 개발사에 플랫폼을 개방한 적이 없다. 저질 게임을 양산하는데 아타리에서 독려를 했다는 주장은 당연히 거짓이다. 퍼블리셔 'Mystique'에서 나온 일련의 포르노 게임들도 퍼블리싱과 서드파티에 대한 아타리의 통제력이 얼마나 없었는지 잘 보여주는 방증이다. 실제로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도 내외에 나왔던 게임은 질이 좋았다. 그러나 1981년 말기부터 게임의 질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당시 아타리 내부에서는 '''"쓰레기를 넣은 카트리지도 백만 개는 팔릴 거야."''' 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아타리 2600의 인기가 절정이었으니 썩 틀린 말도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